Archive for May, 2007

[선교와 나 I-3] 비전스쿨 (2002)

Sunday, May 20th, 2007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다.

2001년에 달라스에 인터콥 지부가 생겼고 그때 청년부 광고 시간에 비전스쿨이라는 선교훈련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난 선교 헌신한 것도 있고 그 해 여름 아마존 단기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 등록해서 훈련을 받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비전스쿨이 열렸던 교회가 지도에도 안나오는 외진 골목에 있어서 길 헤마다 시간도 놓치고 집하고도 너무 멀어서 결국엔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지역 신문 광고를 보니 비전스쿨이 한번 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매년 있는 거라는 걸 알았고 이번엔 꼭 들어야겠다 생각해서 바로 교회를 찾아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렇게 신문광고를 했어도 신문보고 찾아온 사람은 그 전에도 후에도 나밖에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동원을 해보니 신문광고는 사실 직접적인 효과가 거의 없고 다만 사람들에게 자주 노출시켜 이런게 있다는 걸 알려주는게 전부인데.. 그렇게 익숙해지면 나중엔 간접적으로라도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보통 이런 훈련은 알음 알음을 통해 온다.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서, 또 누가 누가 들었는데 좋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신문광고를 보고 띡 나타났을때 다들 놀래고(?) 반가워하였다.  난 몇년째 비전스쿨 동원할 때 신문광고를 하지 않는다.  광고비로 지출할 재정도 없지만 그 보다 1:1 contact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신문사에 기사를 부탁한다. 인터뷰 기사, 비전스쿨 홍보 기사.. 기사 싣는 건 공짜고 우호적인 기자를 만나면 – 대부분 그렇다 – 자리도 많이 할애해 주기 때문에 그렇게 여러번 도움을 받았다.  달라스에서 제일 잘 나가는 뉴스코리아 경우는 이젠 거의 알아서 기사를 내 주신다. 오죽 협조를 잘해 주시면.. 우리끼리 거기 기자님을 간사로 임명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다. ^^

아무튼… 그래서 2002년 봄에 비전스쿨을 들었고..
공교롭게도 그 해는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한 덕분에(?) 아프간이 초미의 이슈였고 갑자기 열린 아프간에 많은 NGO 단체들과 선교사들이 아프간으로 향하던 때였다.  그때 비전스쿨에 오신 강사님 마다 아프가니스탄 얘기를 해 주셨고, 아프가니스탄이 지금 열리고 있다. 도움이 절실하다. 누구라도 가면 할 일이 있다. 이렇게 자극을 주고 도전하셨다. 우즈벡키스탄에 있던 대다수 인터콥 선교사님들이 바로 국경 너머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려가셔서 그곳 난민들을 돕고 계셨고 그 땅의 절실한 상황들을 전해 듣고 나는 매번 울었다. 

누구라도 가면 할 일이 있다고 하시는데.. 그럼 나같은 사람도 가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프간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스쿨을 듣게 되면 졸업할 때까지 미전도종족 중 한 민족을 품어야하는데.. 나는 딱히 한 민족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은 한번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전스쿨을 들으며, 아프리카, 남미 등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 90% 이상의 선교사가 나가는 모순된 상황, 이슬람권 선교의 필요성, 서구와 비서구의 갈등, 몽골, 투르크 등 알타이 민족의 역사, 제3세계의 문화와 종교 등 많은 것을 배웠고 난 매번 강의 때 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눈뜨며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이전까진 난 이과출신이라 역사에 흥미가 없는 것을 당연시 하였는데 – 난 외우는거 싫어해 이딴 식으로 변명을 하며 – 비전스쿨을 들으며 없던 사관이 생기고 역사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우연의 소산이 아닌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움직이는 HIS story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선교 헌신은 KOSTA에서 했지만 나에게 구체적인 방향을 가르쳐 준 것은 비전스쿨이었다.  어떻게 전문인 선교가 가능한지, 막연한 믿음이 아닌 객관적인 지역연구를 통해 어떻게 전략적인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지, 그와 동시에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 따라 믿음을 제한하지 않고 중보기도와 영적전쟁을 통해 어떻게 어둠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는지..

막연히 북한 선교, 중국 선교에서 출발했던 나의 선교 대상은 잠시 아마존으로 옮겨갔다가 이미 그 곳엔 각 교파별로 교회가 있고 신학교가 있는 상황을 떠올리며 10/40창 이슬람권 지역으로 대폭 수정되었다.  이미 교회가 있는 곳엔 가지 말자.  마지막 변방을 향해.. 그 중에서도 우리와 혈통이 같고 동일한 언어권인 우즈벡, 카작, 투르크멘, 위구르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민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나라 아프가니스탄..  이쯤되면 도저히 한 종족을 정할 수가 없었다. 다 섬기고 싶었고 다 사랑스런 민족이었다. 

그런데 모든 일엔 다 때가 있고 제 짝이 있는 듯하다. 지나고 보면 우리 인생의 다양한 변수들이 상호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어떤 방향으로 수렴하는 것을 보지 않는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생각지 못했던 인연으로.. 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관리해 주시는 걸 믿는다.

[선교와 나 I-2] 아마존 선교 (2001)

Friday, May 18th, 2007

2001년은
내 지난날 중 가장 고통스럽고.. 역설적이게도 가장 은혜가 넘친 해였다.

그해 4월에 대학 4년을 같이 다니고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난 내가 헤어질 것을 결정했고 그 사람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늘 난데 내가 이별로 그렇게 고생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잠이 많고 –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 입맛이 없어서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 그 때 처음으로 불면증과 거식증에 시달렸다.

처음 한 두 주는 심각했고, 시간이 가면서 밥은 먹었는데 불면증은 좀 오래 갔다. 서너달..  매일 밤 재워달라고 기도하고 어렵게 잠이 들고도 새벽에 자주 깼다.  그래서 그때 내가 날씬했다.  몸무게가 파운드로 두자리 숫자로 떨어지더라.  그 힘든 중에도 살 빠지는 걸 즐기고 있는데(어머.. 오늘도 3파운드 빠졌어~~) 어느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니 그렇게 앙상하고 초췌할 수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을 찌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는 그 사람과 내가 같은 길을 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뭐 별로 흠잡을게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맨날 억지쓰고 떼쓰는 나를 잘 받아주었고 나보다 공부도 잘해서 유망했고 게으르고 덤벙대며 일벌리기만 좋아하는 내 옆에서 성실하고 한결같은 그가 많이 챙겼다.  교회에서도 같이 청년부를 섬겼는데 내가 사고치면 그는 수습하고 손발이 잘 맞았다.  문제는 난 일벌리는 쪽이 내가 아니길 바랬다.  그에게 리더쉽이 있길 바랬다.  그가 영적 리더쉽을 가지고 날 이끌어 주길 바랬고, 내가 사고치기 전에 그가 먼저 우리의 비전에 대해 말해 주길 바랬다.  난 그때 어렸고, 꿈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 현실감각 떨어진 이상주의자여서 내가 이게 하고 싶다 저게 하고 싶다.. 그런 얘길 하면.. 그는 맨날 이렇게 말했다. "한나가 아직 어려서 그래.. " 난 그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그는 나보다 네살이 많았는데 나이가 든다고 내가 변할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난 원래 꿈꾸는 걸 좋아하고.. 그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좋고 편안했지만 답답했다.

그 사람과 헤어질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난 사실 처음부터 그 사람과 내가 이런 면에서 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지만.. 날 이만큼 좋아해주는 사람이 다시 없을 것 같았고 그러니 이 사랑에 만족하자는 소극적 선택을 한 것이다.  난 사랑에 자신이 없었고, 내가 좋다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는게 행복하진 않았다.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교제를 시작하기 전부터 난 계속 망설였고, 사귀는 중에도 이따금씩, 코스타를 혼자 다녀온 뒤에도 한차례 심각했었지만 그는 바로 바로 나를 잡았고 난 이미 우리의 관계가 학교, 집, 교회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도무지 헤어질 방법은 없는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마지막에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나는 잔인한 말을 했고
그도 더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렇게 끝났다.

난 헤어진 후에 그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많은 일을 후회했다.  그리고 좋게 헤어지는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그렇게 독하고 모진 말을 해댄 것엔 오래 후회하였다.  헤어지고 나서 그는 금방 내 친구 – 다행히 별로 친하지는 않은 – 와 교제를 시작했고 나는 배신감을 느끼며 오래 고통스러워 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잘못한 많은 일들에 대해 벌을 받는 거라고 자책했다.

그 고통이 절정이던 5월 말 나는 청년부와 아마존 단기 선교를 가게 되어 있었다.  서광샘이 첫 사랑의 배신 후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했던가..  나도 비슷했다.  내 주위에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었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숨도 못쉴 것 같았다.  밥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자면서도 울었다.  하지만 단기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고 늘 사람들과 만나야했기 때문에 낮에는 헤어짐을 잘 극복하고 있는 척 유쾌하게 굴었고 – 심지어 그때 내가 너무 잘 지내서 나를 괘씸히 여긴 사람까지 있었으니 나의 포커 페이스가 심각한 수준이긴 했던 모양이다. – 혼자 있을 땐 이별을 곱씹으며 자학했다.

그런 상태로 아마존엘 갔다.  
그것도 그의 새로운 그녀와 한 팀이 되어..

원래는 1주일 단기 일정이었다.  난 body worship과 아이들 여름성경학교를 맡았는데.. 잠도 제대로 못자고 춤추는 게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라 체력도 딸렸다. 하지만 내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는데 온 동네 꼬마 아이들이 "아나, 아나"하고 따르며(포르투갈어로 첫 글자 H 발음은 묵음이다.)  매일 자기 장난감, 카드, 종이꽃을 수 없이 가져다 줬다. 앞에서 노래하고 율동하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다 주는 것도 내겐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주었다.  난 거기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내 마음이 많이 괴로운데..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통해 나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 같았다.  난 그곳에 있는 동안 내 생각은 일절 안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자는 결심으로 갔다.  섬기고 오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만나고 오자.. 그런데 뒤돌아 보니 그 곳에서의 1주일은 온전히 나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시간이 되었다.  또 한번 서광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주의 일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신다."  그땐 그렇게 하루 하루가.. 숨 쉬는 것조차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 살았다.  그의 새로운 그녀가 내 옆칸 그물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아무에게도 내가 얼마나 힘든지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밖엔 기댈 곳도 소망도 없었다.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만 쳐다 봤다. 그 밀림의 찌는 날씨에 하루종일 아이들과 노래하고 춤추다 저녁이 되면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졌지만 그땐 그렇게 해야 살 것 같았다.  음식은 멧돼지와 원숭이 고기가 나오고 조미료 대신 개미를 말려 빻은 생선국이 나왔지만 나는 밥도 잘 먹었다.  끼니를 대충하면 쓰러질지도 몰랐기 때문에 비위에 거슬리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또 인디오 사람들이 우리를 대접하고 우리가 먹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잘 먹어야했다. 같이 간 형제들은 오히려 음식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나는 "고스또죠"(맛있다) "무이뚜 고스또죠"(정말 맛있다) 하면서 잘 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다시 헤어진 그사람과 부딪힐 것이 걱정이 되었다.  
선교사님이 계시는 밀림을 벗어나 마나오스로 나와서 마이애미행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전체 팀 중에 나 혼자만 입국을 못하게 되었다. 난 당시 영주권자였는데 영주권을 집에 두고 브라질을 갔던 것이다.  처음엔 좀 당황했다. 나 혼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그러다 이내 드는 생각이 뭔가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오빠들이 나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고 걱정해 주었고 (그러고 보니 팀 중에 내가 최연소) 시민권 있는 오빠들이 내 보증을 서겠다고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고 나는 덤덤히 다시 상가브리엘로 들어가는 경비행기를 타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나오스 공항에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여기서 너무 은혜 많이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려나봐" 엄마는 주저하지 않고 "아멘" 하셨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 나름 어렸는데 어린 딸래미 혼자 밀림 가는데 아멘하는 울 엄마… 역시 믿음이 좋다.

그때 신기한게 몇 가지 있다.
난 그때 뭐에 씌인 것처럼 영주권을 일부러 집에 두고 갔었다.
한국에 나갈 땐 당연히 들고 나가는걸 브라질을 가면서 혹시 잊어버릴지 모른다고 두고 간게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다.
또 하나.. 난 그때 배낭이 두 개였는데 마나오스 공항에서 짐을 확인하니 땀에 절은 옷을 잔뜩 넣어둔 배낭이 빠진 것이다. 어차피 중요한 물건은 다른 가방에 있고 그 가방엔 냄새나는 옷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루만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 보니… 그 가방에 있던 옷들이 몽땅 빨아져 빨랫줄에 쭉 걸려있는 것이다. 사연인즉 공항에서 내 가방이 다른 짐들 사이에서 빠졌고 그걸 선교사님께서 주워오셔서 세탁기에 돌리신 것이다. 하필 그 많은 짐 중에서 내 가방이.. 그것도 정확하게 빨래 가방이 떨어진 것도 신기하고, 난 당장 갈아입을 옷이 한벌도 없었는데 그 덕분에 옷걱정 없이 무사히 두 주를 버틸 수 있었다.

또 재밌는 일도 많았다.
딱 하루만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는데 내가 선교사님 트럭을 타고 마을로 들어가는 걸 동네 어느 꼬마가 본 것이다. 그 꼬마가 엄마에게 아나를 봤다고 하니 그 엄마는 네가 미쳤구나.. 아나는 미국에 갔는데 어떻게 보냐고..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선교사님 댁에 와서는 그 자리에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내가 가르쳐준 찬양과 율동을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연습하고 있는 것도 보았고 선교지에 남아 있는 동안 그곳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우리팀이 했던 VBS(여름성경학교) 프로그램을 전수(?)하고 또 하도 이집저집에서 놀러오라는 초대를 많이 받아서 매일 매일 심방(?)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얻어 먹고 낮에는 선교사님 번역도 도와드리고 밤에는 선교사님 아들이 집에 남기고 간 슬램덩크를 읽으며 너무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선교사님 내외와 인디오 신학생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고 나오면 아마존의 검은강 위로 가득한 구름을 바라보며 저 구름처럼 나를 덮고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느꼈다.  아마존으로 다시 돌아가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열병을 앓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내 신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밥을 먹으면 토하고 선교사님 폐 끼칠까봐 아픈 내색도 못하고 있는데 그 더위에 오한이 나서 더운물로 샤워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샤워기를 고쳐주셨고 도저히 입맛이 없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는데 그 아마존에서 죽이 생겼다.  난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고 입히며 돌보시는 것을 그때만큼 확실하게 느꼈던 적이 없다.

그때 난 꽤 심하게 아팠는데 사흘인가 내리 아프니까 선교사님께서 말라리아가 아닌가 걱정이 된다고 주사 맞으러 가자고 하셨다. 난 말라리아도 무섭지만 주사 맞는게 더 무서워서 하루만 더 버텨보겠다고 말씀드렸는데 호전되질 않아 기어이 선교사님 손에 이끌려 약국에 가서 주사를 한방 맞았다.  선교사님께서 주사 맞으러 가는 길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은 주를 위해 열번 죽으라고 하면 열번을 죽을텐데..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그 생각을 하신다고.. 나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ㅠ,.ㅜ) 주사를 맞았고.. 엄청 아팠는데.. 신기하게 주사맞고 나니 열도 금방 내리고 밥먹고 토하는 것도 싹 나았다.

떠나기 삼사일 전인가.. 철야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예배 마치고 두 명씩 서로의 기도제목을 놓고 짝기도를 했는데 난 선교사님 사모님과 짝이 되었다.  선교사님 내외분과 같이 지낸 3주 동안 그분들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은 터라 사모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데 도중에 방언 은사를 받게 되었다… 한참 울며 기도하는데.. 사모님께서.. "자기 방언 받았지?"하셨다.. 나도 내가 방언을 하는 것 같아서 얼떨떨하고 놀랬는데 "그..그런 것 같아요." 했다. 그 다음부터 계속 방언 기도가 나오고 이게 내 힘으로 하는게 아닌 게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내 믿음을 또 한번 일으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가 엄마에게 미리 말했던대로 아마존에 머무는 3주간 하나님은 내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때 역사하신 하나님이 너무 강렬해서 내가 주를 사랑하고 더욱 주를 사랑하기 위해 달려가는지 모른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편애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사랑을 받아서 내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할 자가 되어야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달라스로 돌아와서 예배 때 간증을 했고 사람들은 내가 방언도 받고 너무 재밌는 경험을 많이 한 것을 부러워하였다.  미리 떠난 팀들은 전혀 관광을 못했지만 난 나중에 적도 표시 옆에도 가보고 다른 사람들은 먹지 못한 브라질 요리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받았던 엄청난 사랑.. 온 동네의 스타가 되는 그런 경험을 무엇에 비긴단 말인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를 주면 그들은 열로 갚았다.  난 그때 이미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다.  선교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거라는 걸.. 내가 주를 위해 작은 것을 드릴 때 주님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걸… 한 영혼 한 민족을 사랑하는 일,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힘도 의지도 주신다는 걸..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힘들었지만, 내겐 많은 교훈을 주었다.
내가 그 사람을 좀 더 믿어주었더라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무슨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혜롭지 못했던 내 행동 때문에 많이 자책하고 후회했다.
그 후로도 상처를 딛고 서는데는 참 긴 시간이 걸렸다.  

2001년은 그렇게..
많이 아팠고 많이 감격했고 많이 울었다.

[선교와 나 I-1] 선교 헌신 (2000)

Thursday, May 17th, 2007

헌신..
이런 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자신을 바친다. 자신의 삶을 드린다. 그런 의미일테다.
전에도 썼지만 난 헌신에 대한 결정을 쉽게 한 편이다.
뭣도 모르고 쉽게 헌신하면 쉽게 포기할 위험이 있다던데… ㅎㅎ;;
그땐 정말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일어섰는데 참 신기한게 그날 이후로 내 삶이 쭉 선교와 연결된 것을 보면 결국 내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내 삶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난 2000년도에 매년 시카고에서 열리는 KOSTA(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 집회에 참석했었다. 지금은 대학생들을 위한 cKOSTA와 대학원생 및 일반인을 위한 KOSTA가 따로 있지만 그때만 해도 KOSTA 하나였고 대학생은 참가수 제한이 있어서 학력까지 속여(?) 신청을 했다. 그해 코스타 주제는 "새 천년을 여는 믿음의 개척자들"이었다. 전체 강의는 그 주제로 가고 선택식 세미나는 대체로 무난하고 유명한 강사들을 찾는데 난 KOSTA에 처음이라 어리둥절한데다 인기 강의들은 자리가 꽉차서 그야 말로 개척자 정신으로 선교 세션을 연달아 듣다가 마음이 열렸다.  물론 그 이전에 여러 사람을 통해 물밑 작업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테다.  마지막날 저녁 집회때 3년에서 5년 중단기 선교에 헌신할 사람을 부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고 내가 혼자 생각을 해봐도.. 이렇게 방학때, 휴가때 열심히 단기선교만 가도 3년, 5년은 될텐데 내가 주를 위해 이걸 못하겠나 싶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갔다.  내가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뭐 복잡하게 재지 않았고.. ‘그래 3년에서 5년.. 적어도 내 인생에서 그만큼은 주께 드리자’ 간단하게 생각했다.  나가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때 1천5백명이 넘게 모였는데 그 중 쿼터(?)..까지는 과장이고 아무튼 무척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갔는데 뒤에 쓸쓸히 남아 자리를 지키려면 그건 무척 편치 않은 노릇이었을 거다.. (분명 앞에 나간 사람 중엔 나처럼 뭐가 뭔지 모르고 나간 사람, 또 군중에 휩쓸려 나간 사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간 사람, 혼자 남아있기 뻘쭘해서 나간 사람… 별별 사람이 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식으로 일어나라고 시키는 거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꼭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결국 나에게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거기에 띡 올라가선 글쎄 복민이 오빠도 만나고 – 내가 이 오빠한테 수원삼성가거든 비전스쿨 꼭 들으라고 했는데 이번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 또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인터콥에서 같이 훈련받고 같이 간사로 섬긴 은영언니도 그자리에 있었다니..  아무튼..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극적인 회심없이 가랑비 옷 젖는 줄 모르게 골수분자된 나로선 그날 그곳에서의 고백이 참 의미가 있다.

그 해 코스타에서 인상적이었던 강사 몇 분이 계신데..
한동대 KAIST 장평훈 교수님과 사모님,
한국교회사에 관심을 갖게 해 주신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님,
그리고 연변과기대에서 오신 김진경 총장님과 지금은 기억이 안나는 모 교수님..
특히 이 모 교수님이 북한의 실상과 북한 선교, 조선족 선교에 대한 간증을 많이 해주셔서 무척 고무된 것이 기억난다.

내가 공대생이기 때문에 공대 교수님들이 평신도로서 학내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걸 보는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었고 선교는 선택된(소위 콜링을 받은) 소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의 몫이라는 고정 관념의 균열, 공대가 의사, 간호사 못지 않게 선교하기에 적합한 학문(^^)이라는 관점 전환이 이때 시작되었다. 더욱이 친가 전체가 이북 출신인 나같은 사람은 북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고 해외에 살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에 갈 기회가 있겠다는 생각, 무엇에든 쉽게 연민을 느끼는 내가 불쌍한 우리 형제를 섬겨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땐 그렇게 막연하게 중국과 조선족, 북한 선교를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선교에 동참하게 될지.. 아직 대학 졸업도 안했고 졸업한 뒤엔 학자금도 갚아야 하는데.. 많은 것이 불투명했다. 내 인생에서 3년에서 5년 주님께 드린다.. 하지만 어차피 훗날의 일이었고. 또 내가 생각한 헌신의 의미도 지극히 작은 것이었다.

어찌됐든 난 선교에 헌신하겠다고 고백을 했고 주님은 내 기도를 들으셨다. 
그 이후론 No Turning Back.. ㅎㅎ
그렇게도 인생은 바뀐다.

[선교와 나 I-0] 들어가며

Wednesday, May 16th, 2007

서른이 되고 보니 자연히 나의 이십대를 돌아보게 되고 또 앞으로 십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 고민을 하게 된다.

스물에는 과거도 볼 게 없고 미래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서른에는 비로소 내 과거의 굵직 굵직한 사건(dots) 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 모든 사건을 관통(Connecting the dots)하는 어떤 섭리가 느껴진다. 더불어 앞으로 무엇을 할 지, 어떻게 살 지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공자도 서른을 입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매일 매일이 똑같은 하루 같은데 그것이 쌓이고 보니 삶이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꼭 30이란 숫자에 무슨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어찌하든 사람이 살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은 마땅하고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해서 내가 어떻게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고, 선교를 내 삶의 목표로 지향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무엇인지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혹시라도 나를 보고 도전받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일은 늘 벌려도 수습은 잘 안되는데.. 글발도 잘 받을지 의문이고.. 그래도 일단 시작해 보겠다.

[선교와 나 I-1] 선교 헌신 (2000)
[선교와 나 I-2] 아마존 선교 (2001)
[선교와 나 I-3] 비전스쿨 (2002)
[선교와 나 I-4] 최바울 본부장님과의 만남 (2003)
[선교와 나 I-5] 예루살렘예수행진 (2004)
[선교와 나 I-6] 비전팀장 (2005)
[선교와 나 I-7]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오만 (2006)

“no sense of self-worth” -> “rescuer”

Thursday, May 3rd, 2007

작년 말에 블락버스터 토탈 엑세스라고 월 $17.99을 내면 한번에 DVD 3장씩 무제한 빌려 볼 수 있는 서비스에 가입했다. 상준이가 이렇게 해서 24 시리즈 등등 엄청나게 보고 있다고 자랑??을 해서.. 나도 알아봤는데 처음엔 무료로 2주 trial을 할 수 있고 해보니 만족스러워서 몇 달 째 가입 중이다.

Netflix나 내내 비슷한데.. 좋은 것은 다 본 DVD를 우체통에 넣지 않아도 집에 가는 길에 동네 아무 블락버스터에나 갖다 주면 그 자리에서 리턴 처리 되고, 또 리턴한 DVD 개수 만큼 다른 영화를 빌려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로 블락버스터 웹사이트에 설정해 둔 내 영화 리스트에서 다음 차례 영화가 배송되는 것은 물론이다.

리턴 날짜도 없고, 영화 다 본 뒤에 다음 타이틀이 언제 배송 되나 신경쓸 일도 없다.
또 영화 받는 건 몰라도, 리턴을 직접 가게에서 하면 안심되는 점도 있고… 이걸 우체통에 넣자면 얇은 봉투가 찢어지진 않을까.. 분실해서 돈을 물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을 거다.  내가 사는 동네는 사방에 블락버스터가 있어서 퇴근 하는 길에 잠깐 들리면 되고 또 그자리에서 바로 다른 타이틀로 교체하는 재미도 있고..  Blockbuster 광고 문구 대로 "Never be without a movie"

단 하나의 문제는.. 본전을 뽑겠다는 의지가 충만해서 절제 없이 많은 영화를 보게 되는 점이다.
High quality, 편리한 서비스 같은 Practical benefit 외에도 + 합법적으로 컨텐츠를 소비하는 양심적 기쁨 + 거기다 본전을 뽑았다는 안도감?까지 얻으려면 잠을 줄여가며 -_-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수 밖에…
최근엔 너무 바빠서 지난 한달은 거의 아무것도 못봤지만 지난 몇 개월 간 소비한 양이 과거 수 년 간 본 영화/드라마를 소비한 총량보다 많을 것이다.. 설거지 하면서도 보고, 자면서도 보고.. 아주 그냥..

덕분에 24, Rome, Grey’s Anatomy.. 유명하다는 드라마들 시즌 하나, 둘을 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쉬지도 않고 보다 보면 질리는 구석이 있다.

24: 난 액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총 많이 쏘고 피보는 장면 딱 질색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가슴을 졸여서 전혀 다음 시즌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Rome: 이런 스토리 너무 좋아하데 야하고 문란해서 보고 나면 영이 혼탁해지는 느낌. Out.
Grey’s Anatomy: 얘는 그냥 별로

이렇게 재밌는게 없나 하고 기웃기웃하다 Prison Break를 보게 됐고, 현재 시즌 1의 중간 정도 보고 있는데 so far so good이다. ^^

이 드라마에 나오는 스코필드가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냉소적이고 철두철미한데 그의 심장은 따뜻하고 정의롭다.
그에 대해 잘 이해하려면 한때 그를 치료했던 정신치료사의 말을 들어보면 된다.

Old Doc: Michael suffered from a couple of things. One was a condition called low-latent inhibition.
Sara: I’m sorry. I’m not familiar with the term.
Old Doc: Well, people who suffer from low-latent inhibition see everyday things just like you or I do.  Like this lamp, for instance. But where we just processthe image of a lamp, they process everything. The stem, the bulb, the bolts even the washers inside. Their brains are more open to incoming stimuli in the surrounding environment.  Other people’s brains, yours and mine shut out the same information. We have to do it in order to keep our sanity.  If someone with a low IQ has low-latent inhibition, it almost always results in mental illness. But if someone has a high IQ, it almost always results in creative genius.

Sara: Do you think Michael’s a genius?
Old Doc: Well, I think that word’s been derogated in the media these days, but in the classic sense of the word, yes, I do.

Sara: You, you said there was something else you treated him for.
Old Doc: He came to me with absolutely no sense of self-worth.  The loss of both parents very often does that to a child.  But with the low-latent inhibition, something interesting happened to Michael.  He became very attuned to all the suffering around him.  He couldn’t shut it out.  He became a rescuer, one of those people who are more concerned with other people’s welfare than their own.

우리 뇌는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일정 이상의 정보는 차단해야(latent inhibition)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low latent inhibition) 사람들이 있다. 이런 information overload를 두뇌가 감당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정신 질환을 앓을 수도 있고, 천재가 될 수도 있는데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후자이다.
게다가 주인공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고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존감(self-worth)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고 자기 주변의 온갖 고통을 떠 안으며 자학하는 타입인데 .. 여기에 low latent inhibition가 작동하여 그를 rescuer(구원자)가 되게 한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데 목숨거는..

이 드라마를 보다가 그냥 여러가지 생각이 스친다.
분명 다른 사람에 비해 이타심이 발달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를 돌아보기 보다 남걱정에 잠 못자는 사람들이 있다.
난 그다지 이타적이지도 low latent inhibition을 겪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남걱정에 특별한 은사가 있다. 조실부모 하지도 않았고 이기심도 많은데도 self-worth가 낮아서인지 내 삶을 던지는 걸 두려워하는 정도가 적은 것 같다. 

내가 사는 것보다 남을 살리는게 낫다.
남이 죽고 내가 살까봐 무섭다.
더 무서운건 나 때문에 남이 죽는 것.

내가 바라는게 딱 하나 있다면..
많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됐으면…
돈을 많이 벌든 말든..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을 가든 말든..
모든 건 다 secondary이고 정말 하고 싶은 건..
사람들 해 끼치지 않고 뭔가 도움되는 인생이었으면..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주위 사방 신경 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 멋대로인 나를 보면.. 난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다중인격장애)인지도 모르겠다.